요동치는 마음







바쁘신 와중에도 '걸음아 날 살려라' 세미나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차장이 협소해서 차량 정리를 하느라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모임이 모임인 만큼 다음에는 가급적 대중교통이나 걸어서 와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원래는 베르나르 올리비에 작가님의 강연으로 시작하려 했으나 차가 막혀 조금 늦으신다니까 오실 때까지 제 이야기를 조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로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하 아무개라고 합니다.
하루 만 보 이상 걸은 지는 십 년이 넘었고요. 2011년 안나푸르나, 2015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올해 5월에는 미국 PCT를 한 달간 걷다가 왔습니다.
많은 회원님들처럼 건강이나 체중을 줄이려고 걸은 경우는 아니고, 좌불안석이라고 해야 하나요. 불안해서 걷던 일이 현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십 대 때는 친구들이 저를 ‘급현혹’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에나 쉽고 빠르게 반하곤 한다고요. 어쩌면 지금보다는 순수했던 시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저는 격랑 위에 뗏목처럼 늘 요동치고 불안했었는데요, 삶의 푯대를 찾아 참 여러 곳을 기웃거렸습니다.
백 년 전 죽은 철학자에게도, 신에게도, 현명한 애인에게도, 시골로 내려가 자연에도 잠시 기대어 보았지만, 밖에서 구해온 홑겹의 깨달음들은 아스팔트 위로 내리는 비처럼 결국은 스미지 못하고 쉽게 휘발되고 말았습니다. 효능이 뛰어난 각성제였지만, 저 역시 면역력이 높아졌습니다.
어느 날 밤, 답답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 동네를 걷게 되었는데 걷다 보니 성수대교를 건너 서울숲에 가게 됐어요. 아직 서울숲이 개장하기 전이었는데 밤의 숲이 좋더라고요. 차도 사람도 없고, 우선 조용한 게 너무 좋았습니다. 나무도 듬성듬성 심겨 있고 풍경이랄 것도 없었지만 서울에 이렇게 아무 방해 없이 걸을 수 있는 곳이 있단 사실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매일 걸으러 성수대교를 건너서 서울숲을 갔어요. 그렇게 밤마다 동틀 때까지 걷다 보니 걷는 동안은 견딜만하더라고요. 뭐랄까 걸을 때는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은 억울함 같은 게 저를 누르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답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같은 결과 무늬를 가진 사람.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믿고 싶었던 사람. 바로 저 자신 이였습니다.
누워서 떠올리는 생각들이 부표하다 가라앉는 관념의 야적이라면, 걸으면서 하는 자문자답은 지향과 속도가 있어 지속성이 있었습니다. 마치 바둑의 복기처럼, 영화의 부감 촬영처럼,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관과 객관을 지나 간주관 까지. 훗날 그것이 시간의 속성임을 깨달았지만, 걸으면서 스스로 묻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거예요.
밖에서 찾은 다른 답들과는 달리 남루하고 옹색했지만, 저에게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심히 기워가며 입을지언정, 이제 더 이상 남의 옷은 입지 말자. 그런 생각으로 매일 걷고 있습니다.
지금 막 베르나르 올리비에 선생님이 주차장에 도착했다고 하네요. 강연 중에는 사진 촬영이나 질문을 자제해 주시고 마치고 나서 따로 질의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얼마 전 안나푸르나에서 조난 당한 삼십 대 초반의 한 대원이 사고 전날 썼던 일기의 한 부분을 읽고 저는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빈자리 없이 채워주신 회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요동치는 마음’ 레시피


<재료>
보드카 45ml
예거 마이스터 30ml
깔루아 15ml
콜라 60ml
청심환 반개

믹싱글라스에 재료와 얼음을 넣고 바 스푼으로 차가워질 때 까지 젓는다.스트레이너로 얼음을 걸러 내고 적당한 잔에 옮긴다.청심환 반개를 먹고 천천히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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