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







한 사람의 친구도 버겁다. 니체가 한 말이다.
한 사람이면 돼요 덕현씨. 그 한 사람이 없어서 다들 힘들어하는 거예요. 불교대학 다니던 시절 가까이 지냈던 스님이 했던 말이다.
나를 봐라 네 아버지 한 사람 잘못 만나서... 많은 자식들이 자주 듣는 말이다.
장사를 처음 시작하던 무렵 내 머릿속에도 오직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용기 있고 호기심 있는 한 사람.
우연히 그런 한 사람이 가게에 오고 만족만 하고 돌아간다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가게는 손님들로 채워지겠지.

가게를 오픈하고 정확히 나흘 만에 지인을 제외한 첫 손님이 왔다.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손님이 안 와도 걱정이었지만 막상 손님이 오니 더 걱정이었다.
편한 곳으로 앉으세요. 떨리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인이 몇 명 앉은 바를 제외하곤 가게는 텅 비어있었지만 남자는 한가운데에 있는 가장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을 오래 보더니 '모슬포 블루'를 주문했다. 메뉴판 가장 위에 있는 메뉴였다.
가게에 사람이 한 명 늘었는데 정적은 더 선명하고 두드러졌다. 남자는 30분 정도 조용히 술을 마시고는 계산을 하고 나갔다.
손님이 너무 없어 불편했나. 음악 선곡이 별로였던 것 같아. 내일 조명의 조도를 좀 더 낮춰 봐야지. 나흘만의 첫 손님이라 반성은 깊고 길게 이어졌다.
다시는 오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는 다음 날 가게에 왔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방어진 블루'를 주문했다. 메뉴판 두 번째 메뉴였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남자는 가게에 왔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에 적힌 순서대로 매일 한 잔씩 주문하고 조용히 머물다가 떠났다. 그 시절 가게의 유일한 손님이었기에 무척 소중했지만, 그러기에 더 조심스러웠다. 어린 시절 예뻐서 조물딱 거리다가 죽였던 병아리들을 떠올렸다. 그 시절의 나는 병아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무관심과 거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남자는 매일 가게를 찾아 왔지만 바에 앉지를 않았기에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열흘 정도를 매일 혼자 오던 남자는 어느 날 좀 더 어려 보이는 여자분과 같이 왔다. 한 사람이 두 사람으로, 매출이 두 배로 올랐던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 날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남자분은 근처 대학의 영상과 학생이었고 여자분은 '영상촌'이라는 영화 동아리의 후배였다. 그 날 이후로 가게는 영상촌 사람들이 한 명씩 드나들었고 예술대 학생들이 오기 시작하더니 인문대에서 경상대로 이어지다가 동네 주민들도 오기 시작했다. 가게를 열고 오 개월 정도 지나고 나서야 14평의 가게가 만석이 되었다. 혼자 일하던 시절이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조용히 바를 비우고 몰래 만석의 가게를 휴대폰으로 찍었던 기억이 난다. 긴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성취감이었다. 사람이 늘어나고 바빠져도 그 손님은 성실히 가게를 찾아주었다. 둘 다 사진과 영화를 좋아해 나눌 수 있는 얘기들이 많았다. 그 손님은 진지하고 무거운 질문을 자주 했는데 연애가 잘 안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점이 좋아서 어떤 질문은 며칠씩 고민하다가 대답을 하기도 했다. 저분은 마치 이 가게 인테리어의 일부 같아요. 다른 손님이 그분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매일같이 가게에 와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글을 쓰던 그분 덕에 개업 초기에 건전한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다. 알게 된 지도 오래되고 몇 번 밖에서 본 적도 있지만 서로 말을 놓거나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그 손님과의 관계와 거리가 자양분이 되어 지금은 많은 단골손님이 생겼다. 고마움의 배당금 이란 게 있다면 모두 드리리.
얼마 전에 영월에 캠핑을 갔다가 알게 된 친구가 그분 얘기를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대학 후배인데 몇 년 전에 자신을 데리고 우리 가게에 갔었다고 했다. 인연의 서늘함이란.
이제는 내가 가게에서 근무하지 않고 그분도 학교를 졸업해서 자연스레 못 보게 되었는데, 전해 들은 얘기로는 사회적 기업을 얼마간 다니다가 그만두고 전통주 제조를 배웠는데 그것도 그만두고 다시 단편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에 받았던 연락은 작년 추석 때 받았던 휴대폰 메시지였다.

사장님 잘 지내시죠?
여행 중이라 얘기 들었습니다.
오늘 직접 만든 술을 몇 가지 가져왔는데 안 계셔서 독일주택에 맡겨 두었습니다.
직원들이랑 같이 맛보세요. 달을 보니까 단맛에서 같이 명절 보내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건강하세요.


-한사람 레시피
재료
연미주 30ml
복순도가 막걸리 90ml
사이다 30ml
솔잎 한 개

적당한 잔에 연미주, 복순도가 막걸리, 사이다 순으로 섞이지 않게 조심히 따른다.
솔잎을 띄어 낸다.
 




←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