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있는 삶 

동시성이 만든 공간

동시성이란(Synchronicity) 칼 융이 제안한 개념으로 서로 다른 사건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의미 있는 관련성을 갖는 현상을 말한다.
텅 비어있는 삶을 준비하면서 이 개념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외부 인테리어팀과 작업하기로 계획했고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A라는 팀과 미팅을 했다. 그 팀도 현장을 보더니 작업은 맡고 싶은데 진행 중인 일이 있어서 한 달 정도 후에나 일을 시작할 수 있고 디자인하는 시간도 한 달 정도 추가로 필요하다고 했다. 이곳의 임대료가 현현의 다른 매장들보다 높은 편이었기에 두 달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함께 일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가 한창인 시절 진행했던 터라 전체 공사비가 정확하게 책정되어 있었다. 실은 그 돈도 갑자기 귀인이 나타나서 빌려준 돈으로 우리는 정해진 비용 이상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팅 때 꼭 그 금액에 맞춰 달라고 요청했고 그쪽에서도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두 달 후에 받았던 견적은 정확히 두 배가 높은 금액이었다. 제안해 주신 디자인은 마음에 들었지만 도저히 그 금액으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뛰어난 팀이랑 일하게 됐기에 회사 내부적으로 공간에 대해서는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었는데 앞이 캄캄했다. 지나간 두 달의 시간이 뼈 아팠다. A팀 사무실에서 힘 없이 나오는데 친구 J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뭐해요. 괜찮은 대만 음식점 찾았는데 오늘 한잔할래요?"
마침 A팀 사무실 근처라 그곳으로 갔다. 한참 술을 마시던 중에 J는 나에게 표정이 어둡다고 이유를 물었고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J는 갑자기 생각나는 팀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 조명을 의뢰하면서 알게 된 팀인데 뭔가 현현이랑 잘 맞을 것 같다는 설명도 했다. 다만 젊고 이제 시작하는 팀이라서 포트폴리오는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몇 장 없는 SNS의 작업 이미지를 보고 직감적으로 끌렸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락을 부탁했고 J는 그 자리에서 전화했다. 당분간 공간 일은 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한층 더 무거워진 분위기로 술을 마시던 중 다시 전화가 와서 아까의 말을 번복하고 작업을 맡겠다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다음날 미팅을 하기로 했고 현장에서 만나고 깜짝 놀랐다. 두 명 중 한 명이 내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15년 전 안나푸르나에서 한 달간 트래킹을 했을 때 만났던 S였다. 호기롭게 안나푸르나를 가이드나 일행 없이 혼자서 한 달간 걸었는데 15일쯤 지났을 때 한계가 왔다. 그 한계는 체력적인 게 아니었고 외로움이었다. 당시에 이미 1년 가까이 혼자서 장기 여행 중이었고 외로움은 잘 타지 않는 편이라 걱정하지 않았는데 히말라야에서는 달랐다. 매일 8시간 가까이 고산을 걷는 여정은 다음 롯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런 시간이 2주 정도 지나고 마주한 외로움은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정말 외로움이 뚝뚝 떨어져서 이렇게는 더 이상 못 걷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S를 만났다. S는 막 군대에서 제대한 대학생이었고 안나푸르나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틸리초(4,920m)를 가는 중이었다. 나는 틸리초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S랑 헤어질 수는 없었기에 계획을 바꿔서 남은 히말라야 여정을 함께했다. 조용하고 사려 깊은 S는 좋은 여행 메이트였고 덕분에 나에게 네팔은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되어 있다. 대부분 여행자가 그렇듯이 여행에서 만난 사람은 길 위에서만 유효한 관계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연락하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잊고 있었던 S에 대해서 그즈음에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내용도 웃겼는데 사실 S는 인도의 어떤 지역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사조차 하지 않았는데 장필순의 노래처럼 나의 외로움이 S를 안나푸르나로 불렀다는 얘기였다. 어쨌든 그 팀(송전동)을 만나서 이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텅 비어있는 삶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S는 현현의 공간팀으로 합류해 함께 일하고 있다.
회사에서 닉네임을 사용하는데 정하지 못하고 있길래 내가 안나(안나푸르나)라고 지어주었다.

조금 덧붙여 말하면 15년 만에 S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시절 느낌 그대로여서 충격을 받았다. 맑고 조용한 틸리초처럼. 그것은 내게 사람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하는 선물 같은 일이었다.





2021년 12월 ~ 영업 중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82 로얄창덕궁빌딩 7층

인테리어 디자인 - 송전동
시공 - 송전동, 바하 P&D
브랜딩 - 현현
BI - zesstype
 <틸리초 같은 안나>

<안나야 15년 뒤에 만나!>

텅 / 비어있는삶 BI








로얄 창덕궁 빌딩, 이 건물 7층에 텅과 비어있는 삶이 있다.








가구는 대부분 황학동과 당근마켓을 이용했다.
변태같은 송전동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텅의 스탠드 조명

작업하다 말고 한참을 바라본 풍경🍁

D-1 발등에 불이 떨어진 팀 🔥

내일 오픈할 수 있을까? D-1

CEO가 되어서 보고 싶었던 풍경😎



텅의 ‘ㅌ’을 형상화한 심볼

텅의 쿠폰, O에 도장을 찍으면 텅이 완성된다

텅에서 판매중인 원두

개업 첫날 눈이 펑펑 내렸다.
다정한 공터

'나를 줄이면 환한 바깥' 유성용 작가님이 책에 사인해 줄 때 적어주는 문장인데요, 로얄창덕궁빌딩에 올랐을 때 처음 든 생각이기도 합니다. 북쪽으로는 창덕궁과 인왕산이 보이구요 남쪽으로는 운현궁과 남산타워가 보여요.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건물이 오랜 리모델링 공사를 끝낸 첫날,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 갔다가 풍경에 덜컥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운이 좋게도 건물주께서 예전에 독일주택을 방문하시고 좋은 기억을 갖고 계셨고 많은 부분 배려해 주셔서 어려운 시국이지만 임대를 얻게 되었습니다. 공터라는 단어가 서울에서는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한 존재가 되었는데요, 이곳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으면 광화문 빌딩 사이에서 용케 비어있는 공터에 있는 기분입니다. 자연스레 내부를 채우는 인테리어보다는 바깥 풍경과 조응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창덕궁이 보이는 701호는 '텅'이라는 카페구요 인왕산이 보이는 702호는 '비어있는 삶'이라는 맥주 바입니다.(와인도 판매해요.) 단체보다는 혼자나 둘이서 즐기기에 알맞은 공간입니다. 안국역 근처에서 쉴 수 있는 다정한 공터를 찾으신다면 들러주세요. 개업을 알리기에는 면구스러운 요즘이지만 내일부터 영업합니다. 모두 건강한 연말이 되시길 빌며.

- 개업 당시의 글

밤이 되면 비어있는삶에서는 시티팝이 흐른다🌃


오픈 당시 포스터로 쓰였던 사진







텅 비어있는삶에서 바라본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