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정신이 마약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이에요. 정말입니다.
왜 그렇게 취했냐는 질문에 손님은 이렇게 답했다.
하루에 책을 두 권씩 읽거나 두 편의 영화를 보거나 두 번의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지 않으면서고작 두 병의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한심하게 바라보죠. 사장님도 같은 생각이신 거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장님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게 맞춰 보세요. 쌓이기는 하는데 덮을 순 없는 게 뭐게요.
글쎄요.
죄.
죄예요 죄.
그렇군요.
죄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데 어떻게 취하지 않을 수 있나요.
내가 그동안 지은 죄를 생각하는 동안 손님은 바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술이 액체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내가 장사를 하겠다고 주위에 말했을 때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나중에 그게 술집이라는 걸 알고는 모두 놀랐다.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후자였다.
특히 술 자체보다 술에 취한 사람을 견디지 못했다.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화로 발현 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가까울수록 좋아할수록 그 화는 커졌다. 좋아하던 친구나 애인도 술에 취해서 눈빛과 혀가 풀리면 정이 떨어지고 고양되던 감정들도 빠르게 식곤 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취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나면 한심한 인간으로 보였다. 이십 대 때는 여자친구가 술에 취해서 보고 싶다고 집 앞까지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도 있다. 많이 좋아했던 터라 그 감정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고약하다 싶지만 누군가는 고수를 못 먹고, 고양이를 만질 수 없고, 힙합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문제였다.
가장 참기 힘든 건 늦은 밤 취해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떤 마음으로 전화했는지 알기 때문에 끊을 수도 없었지만 가만히 듣고 있을 수 도 없었다. 다정한 사람들에게 뱉었던 차갑고 모진 말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술집을 하게 됐냐고 묻는다면 그런 게 인생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꼼꼼하게 계획하고 성실히 달려와서 다다른 전혀 다른 곳. 
용감하게 술집을 개업하고 보니 세상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오는 거로는 단골 축에도 못 낄 만큼 애주가들의 술 사랑은 대단했다. 그들은 매일 마셨으며 대게 어느 정도씩 취했다. 예전에는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 이들을 상대하는 바텐더가 나의 직업이다. 저항하는 건 지속되고 살펴보는 건 사라진다고 했던가. 그렇게 싫어하던 취한 사람들을 5년 정도 매일 보다 보니 술에 대한 나의 인식도 크게 변했다. 취한 사람을 보면 이제는 화보다 걱정스러운 생각이 먼저 들고 바에 엎드려 잠든 손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애틋한 마음도 든다. 한 잔만 더 하자는 말은 조금 슬프기도 한 것 같다. 왜 그렇게 취해야만 하는지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가끔 아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냉동실에 넣어 둔 보타니스트로 레몬 없이 만든 진토닉, 버젤피터와 진저에일로 만든 하이볼, 곤약조림과 기린맥주, 깜빠뉴와 레드에일, 해산물을 곁들인 준마이, 여름밤의 피노누아, 추운날 마시는 핫위스키 토디.
그리고 나도 어느 정도는 술을 좋아하게 되었다.

죄 때문에 술을 마시던 손님이 오랜만에 가게를 찾았다.
혹시 무알콜 칵테일도 되나요?
네 준비해 드릴게요. 그런데 웬일로 술을 드시지 않으세요?
사장님 맨정신이 마약입니다. 사람은 늘 깨어있어야 해요. 이 말을 했던 전혜린이 자살하기 전날 요 앞 학림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던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예전에는 올이 풀려나간 털실처럼 느슨했던 손님 얼굴이 오늘따라 강가에 자갈돌처럼 단단하고 매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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