홑겹의 깨달음







-수천 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우연히 한 사람이 그곳을 발견하고 어두워서 랜턴을 켜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나요? 
-환해지겠죠. 단숨에.
-아…
-그런 거예요. 깨달음이란 게. 
-감독님 저 지금 약간 소름 돋았어요. 
-사람들은 공부나 훈련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렇군요. 감독님은 어떻게 깨닫게 되셨나요?
-아파트 베란다
-무슨 말이죠?
-2010년 3월 10일에 눈이 왔어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면서 바깥 풍경을 보다가 깨달음이 온 거예요. 저기 걸려있는 사진이 그날 제가 찍은 사진입니다.
-깨달음은 오는 거군요. 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깨달음 쪽으로 가려고 할수록 깨달음은  영영 멀어지는 겁니다. 
-그 순간 무엇을 깨달으신 건가요?
-깨달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요.
-아...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렵네요. 조금 더 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때는 제 삶이 잠시 평온한 시절이었어요. 준비하던 영화도 엎어지고 모아둔 돈도 다 쓰고, 강남의 반지하 방들을 전전하다 성남 남한산성 근처에 오래되고 작은 변두리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요. 외지고 높은 곳이었지만 월세도 싸고 전망이 좋았어요. 왜 군주 뷰라고 하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경치가 되게 좋았어요. 방 하나에 거실 하나뿐인 작은 곳에 동생이랑 둘이 살았는데 집이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쥐도 없고 곰팡이도 없고. 비가 안 세는 집은 그곳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일이 있을 때 만 서울에 나가고 없는 날은 근처 검단산에 올랐어요. 산이 높지는 않은데 넓어서 산을 오를 때마다 같은 등산로를 걸은 적이 없어요. 매일 다른 길을 몇 시간씩 걸을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요리도 많이 하고 집안일도 공들여서 했어요. 살림에 반질반질 윤이 났다고나 할까. 집이 마음에 드니까 살림이 얼마나 재밌던지. 그리고 불교대학을 다녔어요. 매일 108배를 하고 불경을 읽었어요. 그렇게 꾸준히 공부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화초를 가꾸고, 자연을 가까이하고 사니까 삶이 잔잔했어요. 더 이상 미운 사람도 없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없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고통이 없는 상태잖아요. 그 비슷한 수준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3년 정도 보내다가 문득 그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무슨 말이죠?
-고작 스트레스 안 받고 별문제 없이 안정적으로 살려고 이렇게 태어났나 하는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왜 천국에 있는 사람들한테 어떠냐고 물으면 ‘좋긴 한데’라고 말한다잖아요. 남은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 없다는 어떤 절박함을 느꼈습니다. 아 참, 참고로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너지라고 비유하는 게 낫겠네요. 여튼 고통과 문제를 피해 다니며 살 게 아니라 그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봐야겠다. 희로애략을 충실하게 느끼면서 내 배터리를 다 쓰고 죽어야겠다. 내 영혼은 생생한 체험을 원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됐나요?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하는 태도야말로 궁극의 어리석음입니다.
-아...알겠습니다. 깨닫고 나서 처음 만든 작품이 ‘반성없는 삶’ 인 거죠?
-맞습니다. 앞으로 더 이상 자문자답하면서 살지 않겠다는, 제게는 어떤 선언 같은 작품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감독님 영화를 보고 나서 이유 모를 화가 인다는 평이 많은데요. 혹시 그것도 의도하신 건가요?
-아니요 저는 그 무엇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제 영화에 음악도 없고 대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영화가 문학 같은 이야기이길 원치 않아요. 프리재즈 같은 체험이길 바랍니다. 다만 장자의 말처럼 삶이 꿈이라면 얼른 깨야겠다 빨리 깨려면 평범한 꿈보다는 악몽이 낫겠다 뭐 그런 생각은 합니다.
-끝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해주시죠.
-한 번 데쳐진 채소처럼 순한 독자로 살지말고 법정에 선 진술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주에 무엇을 진술할지 지금 고민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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