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진 블루







사진이 없으면 진즉에 사라졌을 기억이었다. 어떤 남자와 열 세 살의 어린 내가 을씨년스러운 방어진 바다 앞에서 찍은 사진. 엉성하게 만든 간이 선착장 위에서 어색한 포즈로 서로를 붙잡고는, 그날의 날씨처럼 흐릿한 모습으로 카메라를 보고 서 있다.
(...)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일은 힘들고 어두운 공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건 무서웠지만, 5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 돈으로 중학생이 되면 컴퓨터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결국 컴퓨터는 사지 못했고 그 돈은 새어머니가 돌려주지 않았다) 그 일을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같이하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눈에 많이 띄었을 것이다.
당시 울산은 조선소와 자동차 공장으로 경기가 매우 좋았고 내가 살던 곳은 대부분 현대 사원들이 살던 곳이라 맞벌이도 드물고 우리처럼 어린 배달원은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주 마주치는 부산우유 배달원 아주머니는 볼 때마다 우유를 챙겨 주셨고, 경비 아저씨들도 빵이나 음료 같은 간식들을 자전거 바구니에 넣어 주고는 했다.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기특한 형제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루는 비가 많이 내리던 날에 배달을 너무 하기 싫어서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에 일부러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보급소로 신문이 오지 않는다고 전화가 쇄도하고 난리가 났다. 당시에는 휴대폰이나 호출기가 없던 시절이라 보급소에서는 자초지종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7시가 다 돼서야 젖은 신문 뭉치를 가지고 다리를 절뚝이는 연기를 하며 보급소로 돌아갔다. 총무님은 보이지 않고 기복이 형(이름은 정확하지 않다.)이 내 몫의 신문에 광고지를 다시 넣고 있었다. 형이라기엔 삼촌뻘에 가까운 어른이었는데, 아직 총무님은 모르니까 비밀로 하자고 말하고는 오토바이 뒤에 나를 앉히고 내 구역의 신문을 대신 배달해 주었다. 자전거로는 두시간이 꼬박 걸릴 일이 오토바이로 하니 절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주말, 동생과 나를 신문사 오토바이에 태우고 방어진 바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조선소를 인접하고 있어서 물이 깨끗하지 않고 풍경이랄 것도 없는 바다였다. 근처에는 울기등대유원지가 있었는데 유원지라고 해봐야 해송 사이로 조잡한 식당 몇 개와 인형 쏘기, 손으로 돌리는 회전목마, 물방개로 하는 뽑기 등이 있는 군색한 곳이었다.
그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그날의 날씨와 나와 달리 즐거워하던 동생과, 어색한 공기감이었다. 잘 모르는 어른의 호의도 낯설었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난처했다. 힘든 이야기를 조금 하고 동정을 받아야 하는지 동생처럼 마냥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때의 나는 제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도중에 도망가지 않고 애매한 시간을 끝까지 견뎌낸 것이 내가 갖춘 최상의 예의였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를 자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복이 형과의 이별도 이상했다. 몇 달 뒤 신문사 연합 체육대회가 경주 보문단지에서 있었는데, 형이 축구인지 이어달리기인지를 하다가 송전탑에서 지상으로 매여 있는 금속 와이어에 목이 걸려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 형은 입원했는지 그 뒤로 보급소에서 볼 수 없었고 달리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얼마 뒤 중학생이 되면서 신문 배달도 그만두어 그 뒤로는 자연스레 형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랬던 일이 십 여년 전부터 뜬금없이 생각나곤 했다. 당시에는 사진이 본가 창고에 있어서 내 기억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부모님 댁이 이사하면서 앨범을 발견했고 거기서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동생이랑 술을 마시다가 그 사진 이야길 했더니 동생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놀라운 건 동생은 기복이 형을 보급소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이혼하고 잠시 만났던 젊은 애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그날의 일들은 내게 더 모호한 시간으로 남게 되었다. 엄마한테 사진을 보여주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렇게 할지는 모를 일이다.

그날의 희미한 기억과 감정들을 문장으로 옮겨보면 뭔가 정리될 줄 알았는데 별무소용 없는 동심원을 그리고 말았다.
오히려 이제는 잊지 못할 선명한 추억이 되었다고나 할까.
살아갈수록 더 해가는 삶의 어색함과 불가해함.끝끝내 알 수 없거나 모른 체 해야 했을 애매한 시간들.
누구는 인생은 의견이라 말했지만, 내게는 난반사로 쏟아지는 기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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