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빛








찾았다.
음악이 없는 곳.
지난 몇 달간 노랫소리를 피해 부지런히 깊은 산속을 헤맸지만 국내산 어느 곳에나 솔캠족(홀로 캠핑을 즐기는 사람 또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 고독을 즐기려 자연을 찾았지만 음악은 두고 오지 않았다. 서로의 텐트 거리에는 신경 썼지만 소리의 간격에는 무신경했다. 어두운 밤 멀리서 들리는 노랫소리들은 에어컨 실외기 소음과 차이가 없었다. 어쩌다 최신가요를 랜덤으로 트는 캠퍼가 근처에 있으면 잠들기 전까지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산림청에서는 산에서 취사를 금지할 게 아니라 음악을 금지해야 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지난번 봐두었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구매할 참이었다.
지금껏 참았던 이유는 헤드폰을 썼을 때의 갑갑함과 물속에 있는듯한 이명 소리 때문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은 외부의 소리는 잘 차단해 주었지만 내 몸속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더 크게 증폭했다.
침묵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이들을 피하려면 더 높고 외진 곳으로 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했다. 찾아보니 식수와 먹는 것을 제외하고 9kg 이하로 배낭을 꾸리는 것을 BPL(Back Packing Light), 5kg 이하는 ULH(Ultra Light Hiking)라고 했다.
나는 울트라 라이트 하이커가 되기로 했다.
폴대 대신에 등산 스틱을 이용해 설치하는 일인용 텐트 750g, 바닥의 한기를 막아주는 매트는 상반신 사이즈만큼만 잘라서 293g(하반신은 배낭으로 대신한다.), 영하 2도까지 사용할 수 있는 삼계절 다운 침낭이 496g, 의자는 506g, 접이식 테이블은 245g이다. 500ml 티타늄 코펠은 73g, 접으면 오백원짜리 동전만 한 버너는 무게가 고작 25g이다. 점화 장치가 없어서 라이터를 따로 챙겨야 하지만 마음에 드는 장비다. 먹는 과정과 무게를 줄이기 위해 건조 쌀과 즉석 덮밥 소스를 챙겨왔다. 햇반은 맛있고 편하지만 무게가 꽤 나가고 먹고 나서 쓰레기가 생긴다. 이렇게 먹으면 설거짓거리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울트라 라이트 하이커들은 기본적으로 LNT(Leave No Trace 흔적 남기지 않기)를 지킨다. 자기 배설물을 봉투에 담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흙에다 묻는 쪽이다. 휴지는 사용할 만큼만 끊어서 가져가고 물티슈 대신에 코인 티슈를 7개 챙겨 간다. 커피는 포기할 수 없어서 집에서 드립백을 만들기 위해 실링기를 구입했다.
가벼움에도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소리가 없는 곳은 빛도 없었다.
적지 않은 돈과 노력이 들어갔지만 이로써 명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플라스틱 플라스크에 담아 온 위스키를 티타늄 시에라 컵에 따랐다. 티타늄 컵으로 술을 마시면 입안에 쇠 맛이 남았지만 그게 좋았다. 얼음도 안주도 없이 몇 잔 마셨더니 몸이 금세 뜨거워졌다. 아직 정신은 명료했다.
잠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한다. 맥박은 점점 느려지고 머릿속도 마음속도 텅 빈 듯 깨끗하다. 이제 눈을 뜨고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헤드 랜턴을 켠다.
빽빽한 암흑의 입자를 밀어내고 한 줄기 빛의 광선 검이 나타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밤의 허리를 부드럽게 벤다.
스윽 슥, 스윽 슥
베어진 밤은 이내 매끈하게 붙어 버리지만 나는 다시 칼질을 계속한다.
댕강, 댕강, 댕강
익숙한 몇몇 얼굴들이 어둠 속에 윤곽을 드러내다가 조용한 칼질에 베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려진 머리들은 서서히 사라졌다가 또다시 어둠 속에 나타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베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랜턴의 배터리는 오래갔고 여명이 다가와 어둠이 묽어지기 전까지 빛의 난도질은 멈추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하이킹에 빠져서 산을 다니는 줄 알지만, 실은 어둠을 그어대기 위해 오는 것이다.
나는 잊지 않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과 빛’ 레시피


<재료>
콜드 브루 커피 100ml
조니워커 블랙 100ml
라임즙 1TS
라이터

유리잔이 아닌 금속 재질의 컵에 재료를 섞고 어둡고 음악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마신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면 라이터를 켜고 잠시 불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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