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생활자의 수기







이 방은 다 좋은데 햇빛이 조금 아쉽네요. 집이 남향이 아닌가 봐요?
거의 남향에 가깝습니다. 누추한 곳은 햇빛도 인색하기 마련이죠.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중개인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내 얼굴을 보지 않은 체 대답했다. 방이 어두워서 그가 쓴 고글형 안경의 렌즈에 휴대폰의 노란색 화면이 비쳤다.
남자는 검은색 고어텍스 재킷과 신축성 있는 클라이밍 팬츠를 입고 트랙킹화 까지 신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날씬하고 탄탄한 체구였다. 최근에 점을 뺐는지 얼굴에는 재생 테이프가 여러 곳에 붙어 있었는데, 햇빛에 그을린 얼굴 때문에 테이프가 더 두드러져 보였다.
뭐라고 그러셨나요?
집세가 싸면서 볕까지 잘 드는 곳은 없다는 얘깁니다.
남자는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정말 그랬다. 지난 며칠 동안 만났던 부동산 중개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게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만 보여주었다. 그늘진 곳은 빛이 없는 밤에도 다른 곳보다 그늘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도 왠지 그늘져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늘진 곳에 조명을 비추자고 주장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인중개사들은 공시지가 말고도 햇빛이 집 안에 닿는 면적을 측량해서 보증금과 월세로 환산해 놓은 표가 있는 듯했고, 내가 가진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빛은 한 줌이 안되었다.
그나마 이 집은 얼마 전 새로 도배를 해서 벽이 깨끗한 점이 좋았다. 벽지의 민들레 홀씨 무늬가 거슬렸지만, 처지가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

손님 이 집이 볕까지 잘 든다면 이 가격에 내놨겠어요?
정확한 얘기는 불편한 것인가? 불편하게 말하면 정확한 것처럼 들리는 것인가?
뜬금없이 비평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했던 친구가 떠올랐다. 나의 새로운 사진 작업 아이디어를 듣고 실컷 찬물을 끼얹고 나서 했던 얘기였다.
비판과 비평을 혼동하지 말라며 자기는 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날의 기억까지 포개져 기분 나빠진 나는, 호전적인 말투로 말했다.
말씀을 그렇게 밖에 못 하십니까?
달라진 목소리 톤을 인지했는지 남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며 말했다.
정확한 정보가 불편하다면 그 돈으로 방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였다.
‘이 새끼 한 번 칠까?’ 유치한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이래서는 집이 마음에 들어도 기분 나빠서 계약하기 싫은데요.
저는 기분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계약은 더욱 그렇고요. 저를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제 말투가 뭔 상관입니까. 더 보여 줄 매물도 없으니 이제 선택하시죠.
선택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만 보여주고서 선택하라니,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 될 게 자명한 선택을 지금 나보고 하라고? 이것이 이 사람만의 협상 방식인가?
어젯밤 자기 전에 오랜만에 다시 읽은 허브 코헨 협상의 법칙 10가지를 떠올렸다.

1. 신경은 쓰되 너무 신경 쓰지는 않는다.

열 가지 중에 왜 이것만 생각나지? 그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장난이야.
하지만 허브 코헨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계약도 하기 전에 이 사람한테 말리고 있는 거다.
게다가 이 사람도 이 책을 읽었다면...머리가 복잡해질 무렵 남자가 다시 말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전에 요 앞 명보성 사장님도 방을 보고 가셨습니다. 배달원들 숙소로 쓸 거라고 하시면서, 아마 별일 없으면 내일 계약할 것 같습니다.
책을 읽은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하죠 뭐. 저도 잠깐만 살다가 금방 다시 이사해야 해서, 이 정도면 적당한 것 같습니다.
계약금과 중도금 없이 한 번에 잔금을 치렀다. 보증금이 크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집주인은 외국에 살아서 남자가 대신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사는 보름 뒤에 하기로 했다.
계약을 서두른 건 아닌지 후회도 됐지만, 반지하 방치고는 무척 깨끗하다는 점을 위안 삼았다.

보름 뒤, 동생과 처음 보는 동생 친구와 1톤 용달차를 빌려 이사를 했다. 가구가 없어서 이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짐은 다음 날 풀기로 하고 명보성에 가서 짜장면과 탕수육에 빼갈을 마셨다. 차가운 술이 식도를 긁으며 뜨거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같은 정비소에서 일한다는 동생 친구도 동생처럼 말이 없었다. 말없이 술만 마셔서 금세 취했고 술자리도 일찍 끝이 났다. 동생은 친구와 피시방으로 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누웠다. 뒤척일 때 마다 매트리스에서 금속 스프링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이사 할 때는 좋은 매트리스와 에어컨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살았던 곳들을 헤아려 보다가 문득 벽지의 무늬가 지난번과는 조금 달라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보이지. 취해서 그런가?’ 몸을 일으켜 벽 쪽으로 걸어가 벽지를 자세히 보았다.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앉은 것처럼 검푸른 곰팡이가 연하게 피어있었다.
속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지만, 이내 나도 곰팡이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반지하 생활자의 수기’ 레시피


<재료>
*맥문동차 150ml
꿀 3TS
도라지 위스키(없으면 캡틴큐) 50ml
팔각 1개
정향 2개
시나몬 스틱 1개

뜨겁게 끓인 맥문동차에 꿀을 넣고 잘 녹인다. 도라지 위스키를 조심히 붓고 젓지 않는다. 팔각, 정향, 시나몬 스틱을 기호에 따라 넣는다.

*백합과 식물로 그늘진 곳에서 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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