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나를 패려다만 것을 안다







밤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왜 비겁한 순간들은 잊혀지지가 않지.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은 뭉뚱그려 시절로 기억되고 부끄럽던 순간들은 괄호친 것 처럼 봉인되어 남는건지.
그것이 기억의 본성이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한 때는 걸음이 날 살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걸어도 잠잠해지지 않는다. 하루키 처럼 매일 뛰기라도 해야하나.

너는 끝장내고 싶겠지.
밤이 살살 약을 올린다.

걸으면 견딜만 하던 때도 좋았던 시절이었구나.
오늘은 술을 마셔야겠다.
어디로 가야하나? 적당한 술집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동네에 나의 가게가 세 개나 있지만 여러모로 불편해서 갈 수가 없다. 이런 날은 칵테일이나 크래프트 맥주가 아닌 맑은 소주가 필요해. 혼자서 갈만한 선술집을 만들어야겠어. 상호는 '차라리'라고 지어야지. 뭔가 서정적이면서도 술을 당기는 이름이군. 재미있고 용기있는 음식을 손님에게 내어야지. 술 값도 저렴하게 받고 장덕의 노래를 틀거야. 아니다 음악은 틀지말자. 
새로운 가게에 대한 구상에 점점 빠져들 때 즈음 한 시간 전에 '안'에게 보낸 문자에 답문이 왔다.
고마워요 밤에 갑자기 보고싶었던 거예요?
잘됐군 혼자 마시지않아도 되겠어.

슬픔이 통과한 얼굴.
'안'을 처음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장사를 하기 전 극단 '적으로'라는 연극 모임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된 친구가 대학 시절 신문사 동기라며 가게에 데려와서 '안'을 소개시켜 주었다. 경실련에서 간사 일을 보고 있다고 했다. 바에 앉아서 독한 칵테일을 여러 잔 마셨는데도 모서리에 기댄 사람 처럼 흐트러지지 않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사무실이 근처라 그 친구 없이도 자주 놀러와서 근무 없는 날은 가끔 밖에서 술을 같이 마셨다. 왠지 나랑 같은 몫의 슬픔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그런지 술 자리는 편했다.

- 덕현씨 저 이제 구체적으로 살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날은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해보니 덕현씨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제 의미는 그만 찾고 의미에서 놓여나고 싶어요.
- 아니에요 그날은 제가 많이 취해서 실언을 한 것 같아요. 사죄의 의미로 오늘 술은 제가 사고싶어요.
- 반성 없는 삶이 좌우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 그건 제가 그냥 지어 본 잠언집 제목이구요 우리 어디가서 술이나 마셔요.
- 횟집에서 방어회에 소주 세 병을 나눠 마시고 명륜동을 걸었다. 말 없이 한참을 걷다가 내가 말했다.
- 안되는게 되는 거에요.
- 그게 무슨 말이예요?
- 모르겠어요 어떤 책에서 줏은 말이에요.
- 그리고 돈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거래요.
- 누가 그래요?
- 꿈에서 들은 말이에요.
- 덕현씨 오늘 많이 취했나 보다 이상한 말 많이 하네.
나는 쉬지않고 말했다.
- 제 괴로움은 모두 저의 비밀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 그 말이 사실이라면 덕현씨 행복도 비밀에 의탁해 있는 것 아닌가요?
- 그것도 그러네요. 제가 저의 비밀에 대해서 말했던가요?
- 우리 조금 힘들다고 쉽게 마음 털고 그러지 마요. 저는 산호초가 자라듯이 천천히 덕현씨 알아가고 싶으니까. 
- 그리고 비밀이야말로 한 사람의 영혼이래요.
- 누가 그래요?
- 저도 휴게소 화장실에서 주운 문장이에요.
이차를 가자는 나의 제안을 뿌리치고 ‘안’은 택시를 타고 떠났다.
아쉬운데 도어즈에 가서 맥주 한 잔만 더 마시고 갈까. 지금쯤이면 손님이 좀 빠졌겠지.

취했으면 자거라.
밤이 다시 말했다.




‘밤이 나를 패려다만 것을 안다' 레시피


<재료>
바카디151 30ml
아마레또 30ml
그레나딘시럽 15ml
사과쥬스 60ml

온더락 잔에 얼음 4개를 넣고 바카디와 아마레또, 사과쥬스를  넣고 잘 젓는다. 그레나딘 시럽을 얼음 위에 피처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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