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m calm 산악회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우리와 다른 말을 쓴다. 그들은 워커바웃(workabout)이라는 말을 쓴다. 워커바웃이란 간단히 말해 숲을 방랑하는 것이다. 정해놓은 목표도, 기한도, 루트도 없다. 발길 닿는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숲을 돌아다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서구적 탐험의 정반대 개념인 것이다. 바로 그 콘셉트가 내 마음을 무지무지 사로잡았다. <토르비에른 에켈룬. 숲에서 1년>

2015년 10월 23일 새벽 3시.
가게 마감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개 두 마리를 산책시키는 중년 여성을 보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오토바이를 한쪽으로 세우고 지나가는 개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여성분이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개 좋아하세요?
-네? 네.
-그러면 이 사진 좀 봐주시겠어요?
-예쁘네요.
-이름은 마초인데 일주일 뒤에 안락사시켜요. 데려가 키우시겠어요?
-네? 너무 갑작스럽네요. 저는 장사를 하고 있어서 개를 키울 여건이 안됩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엔 해외로 여행을 떠나요.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이에요.
여성분은 그러면 주변에 알려 달라며 개의 사진과 연락처를 주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비행기를 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지 3일째 되던 날 아침, 한 카페에서 그 개가 떠올랐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동생에게 메시지로 개를 데려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내 인생 속으로 댄디가 들어왔다. 처음엔 털의 빛깔 때문에 이름을 버번(Bourbon)이라고 지었는데 동생의 반대로 댄디로 바뀌었다. 세상에 더 이상의 마초는 필요 없었다.

개와 함께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개와 같이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캠핑장과 국립산, 해변 같은 자연 공간마저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경기도의 변두리 산을 찾게 되었다. 아름다운 곳들은 이름이 없었다.
처음 댄디랑 산에서 비박을 하고 온 날이 생각난다. 그런 적이 없었는데 텐트에서 같이 자서인지 침대로 올라왔다. 눈빛을 보니 내려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꾹꾹 눌러 새긴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우울해했다. 산에서 목줄 없는 시간이 그만큼 강렬했으리라. 그날 이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사계절 내내 주 1회 비박을 하고 있다. 평일 늦은 오후에 일을 마치고 산에 올라, 다음날 새벽 일찍 내려와 하루를 시작한다. 일명 퇴근박. 자주 오르는 단골 산도 몇 곳 생기고 산악회 이름도 지었다. calm calm 산악회.
처음에는 분명 댄디를 위해서였는데 점차 나를 위한 시간이 되어갔다. 주변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산에 자주 가냐고, 산에 혼자 있으면 어떤 기분이냐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중독인 것 같다. 공포에 대한 중독. 야심한 밤 아무도 없는 산에 혼자 있는 두려움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무엇이 나타날까 봐 텐트 밖도 무섭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텐트 안도 무섭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주의 기본음을 듣다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진다. 공포가 모조리 잠재우는 것이다.
낮의 산이 기분 좋은 이완제라면 밤의 산은 강력한 각성제인 셈이다. 그렇게 예민한 상태에서는 음악도 노이즈일 뿐이다. 이 의식에 한 명만 추가돼도 산은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어둠과 적막은 매우 독창적이고 유효범위가 넓은 무대 장치로 변한다. 울음터, 토론장, 상담소, 힙한 술집까지. 오랜 시간 미지근한 정으로 지내오던 관계도 하루만 산에서 함께 보내고 오면 변한다. 대화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을 맛본 지인들이 하나둘 장비를 마련했다. 완두라는 또 다른 강아지도 산악회에 합류했다.그래도 가장 좋은 건 여전히 혼자서 산을 찾을 때다. 글을 쓰는 지금도 내일 오를 주금산(벌써 무섭군)을 생각한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첫 공연이 가장 비싸다고 한다. 순수한 떨림이 있어서 그러리라.변두리 산도 당신에게 순도 높은 떨림을 줄 것이다. 그것도 무료로.





‘calm calm 산악회’ 레시피


<재료>
버번 위스키 50ml
맥심 모카골드 1개
물 200ml
계피 1조각(없어도 무방)

모든 재료를 코펠에 넣고 버너로 천천히 끓여 뜨겁게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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